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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Ekk) 일상-1

EKKSEIN 2018. 9. 1. 15:29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이자마자 벌떡 일어나버릴까 했지만, 몸에 이불이 둘둘 말아져 있는걸 깨닫고 레이넬은 재빠르게 눈만 굴렸다. 벽 한쪽에 있는 유리창으로부터 잔잔한 햇빛이 들어와 바닥 양탄자에 무늬를 남기고 있었다.

 

'아. ...잠들어버렸나보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다. 데이트 도중에 잠들다니, 한심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쩌지... 하지만 그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자신도 이젠 서서히 알고 있었다. 그저, 스스로가 느끼기에 자신이 한심할 뿐이다.

 

'역시 무리했나, 그렇지만 데이트를 미루기는 싫었고...'

 

하필이면 데이트가 있는 주말 새벽에 응급 환자가 올게 뭐람, 레이넬은 지난 새벽을 떠올렸다. 약 12시간 전이었던 새벽에 갑자기 연락이 와 응급 환자가 들이닥쳤고, 눈을 비비고선 가운을 겨우 걸친채 수술을 집행하고 나자 해가 이미 뜨고도 남을 시간이었기에 그에게 연락을 해 데이트를 미뤄야한다는 선택지는 떠오르지도 않았었다. 

아니, 환자의 탓은 아니다...다행히 수술도 성공적으로 이뤄졌기에 레이넬도 한숨 돌리며 커피를 한 잔 마실 수 있었고 시계를 멍하니 몇초간 바라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데이트 지각이다!'

 

쾡한 눈에 더해서 꾀죄죄한 자신을 보여주는건 절대 싫기에 재빨리 씻고, 옷을 꿰어입은 후에-다음부터는 빨래도 좀 미리미리 돌려놔야지-진료실을 잠그고 약속장소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급하게 온건 당연히 티 났고, 먼저 온 그는 자신을 보며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짓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하아, 하... ...안녕, 오래 기다렸어?"

"별로요, 그럼 갈까요?"

 

잠을 자지 못해 깜빡이는 눈으로 보아도, 오늘도 여전히 그가 좋았다.

언제나처럼 식사를 하고 (굶주린 탓에 급하게 먹지 않으려고 애썼다) 커피숍에 갔다가, 함께 익숙해진 공원을 거닐며 얘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나온 그의 제안에 끄덕인거까지 간신히 기억이 났다.

 

'괜찮다면 제 집에 갈래요?'

'괜찮은거야?'

'안 될 이유가 없는걸요.'

'흐음... 그래, 그럼 실례할게.'

 

그리고 -그리고, 그의 넓은 저택 앞에서 잠시 눈이 번쩍 뜨이며 놀랐다가, 안에 들어가 그가 차를 대접한다며 잠시 사라졌을때 폭신한 소파에서 눈을 잠시 감아버렸던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인듯 했다. 아, 정말 부끄럽게 이게 뭐냐...레이넬은 속으로 투덜거렸고, 벽면에 있는 시계를 보자 그래도 아주 오래 잠든건 아니었기에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아니, 안심하지 못했다. 그가 제 곁에서 눈을 감고 잠들어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두근대기 시작해 멈추지 않았다. 이 침대는 그의 침대일까, 넓은 킹 사이즈의 고급스러운 침대 위에-자신의 것과는 아마 한참 질이 차이나겠지-폭신한 이불을 제게 잔뜩 꽁꽁 덮어주고, 그는 옆으로 몸을 뉘인채로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옷은 아까 입은채 그대로고, 금빛 머리칼은 베개위에 단정히 흐트러져 있다. 레이넬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다, 처음보는...그의 자는 얼굴. 숨소리조차 나지 않고, 움직임조차 없는채로 그는 제 쪽으로 몸을 향하고 잠에 빠져있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이 상황에 대한 자책은 그만둔채로 그는 잠들어있는 플라네스를 찬찬히-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훑어보았다.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썹도, 이럴때만 볼 수 있는 내리까진 속눈썹도, 자신의 것보다 더 진하고 긴 쌍꺼풀도, 콧잔등과 닫혀있는 입술도... ...한참 보다가 레이넬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볼을 붉히며 이불 안으로 얼굴을 숨겼다. 하지만 이내 다시 눈만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운거 아냐?...내가 움직인건가?'

 

겨우 한뼘 반이 될 거리에, 그가 있다.

데이트를 하며 함께 식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는 거리는 언제나 일정했다. 스킨십은 지금껏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있는게 좋았다... 언젠간, 그와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언젠간 키스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자연스레, 그렇게 하고싶어질때 하리라고...생각해두며 다음번 데이트만을 기다려온 자신이었다. 하지만 역시 거짓말이었어, 레이넬은 씁쓸히 되뇌었다. 언젠간이 아니라...언제나 그와 있을때면 닿고싶었다. 함께 있고, 얘기하고, 그것만으로는 자신이 만족하지 못할 사람이란걸 매번 깨닫는걸.

 

욕심내도 괜찮은걸까, 이미 잔뜩 욕심을 낸 건데.

 

'언젠간.'

 

레이넬은 고개를 조심스레 움직여 플라네스에게 가까이 대려다가 멈칫하고 물러섰다. 대신 이불 안에서 손을 꺼내어 볼 쪽에 대 보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손이 떨려왔다. 하는 수 없이 손가락 끝으로 아주 살짝, 털끝만큼 그의 감긴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가 깰까봐, 곧바로 손을 내려 다시 이불 안에 넣었다. 부스럭 소리가 너무 크게 난거 같기도 했다.

 

"...레이넬, 깼어요?"

 

흠칫, 하고 놀라 눈을 감으려다가 목소리를 듣자 그저 굳은채로 그대로 있었다. 들킨걸까, 저번에 그와 얘기하다가 나온 '잠자다가도 금방 깬다'는 말이 정말이었구나...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폐를 끼쳤어...미안, 새벽에 환자가 왔었거든. 한숨도 못 자고 와서 여기 오자마자 잠들었나봐."

"아뇨, 알고 오자고 한거니까... 좀 더 쉬어도 괜찮아요. 많이 졸린가요?"

 

당신을 보다가 잠이 다 깼어, 라곤 말할 수 없기에 머쓱히 웃고 고개만 저었다. 그와 마주본채로 미소짓다가 가까운 의자에 제 가운이 걸려있는걸 보자 괜히 또 입이 다물어졌다. 묶은 머리도 풀러져 있잖아. 여러모로 할 말이 없었다.

 

"진짜로, 금방 깨네."

 

두근거림을 숨기며 겨우 침착한 채 말한다. 자신이 고개를 들이밀려 했던것도 다 들켰을까, 아닐까.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사실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지금 이 침대에서, 조금이라도 더 함께 누워있고 싶은 작은 욕망이다.

 

"혼자 자게 하면 쓸쓸할거 같아서, 저도 눈을 조금 붙였어요."

 

분명 그랬을거야.

쓸쓸함은 그와 만나고 난 뒤로부터 알게된 감정이니까. 다음번 데이트를 손 꼽아 기다리고, 그 전 날 밤은 설레서 잠들지 못하게 되버렸으니까...고작 몇주만에. 몇 달이라고 할 수 없는 기간안에.

 

정말로 이상하지.

 

"플라네스."

"네."

"고마워."

 

그는 웃는다. 레이넬은 그게 좋았다. 이불 안에서 손을 꺼내 꼼질대며 그의 손을 찾아 겹쳤다.

아, 어쩌면 좋지. 앞으로는 혼자 있을 때 더 쓸쓸함을 느껴버릴거 같았다. 모두 그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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