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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랠

Tayo)서양 패러랠 5

EKKSEIN 2014. 3. 10. 09:36





파티는 끝났지만 묘하게 열기가 남아있는 밤이였다. 거짓 이름, 빌렸을 뿐인 거짓 드레스, 거짓 보석. 이제는 전부 헤어져야 할 시간. 대기실에서 세계를 기다리며 하루는 잠시 거울을 바라봤다. 이제까지 꽤나 자주 본 모습인데도 아직 드레스는 어색해. 나는 역시 길거리 계집앤가봐. 드레스를 살짝 들고 격식있는 인사를 하던 하루가 피식 혼자 웃었다. 인형놀이지, 이 짓도. 드레스에 살짝 진 주름을 손바닥으로 눌러 펴던 하루가 뒤에서 문소리를 들었다. 세계인가? 할 일이 있다고 하더니만 벌써 왔나보네. 오늘은 좀 칭찬해줘야지. 활짝 웃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하루의 얼굴은 방 안으로 들어온 상대를 보자마자 금이 갔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금이 간 표정을 황급히 수습한 하루가 자아에게 인사했다. 그린 듯이 완벽한 귀족식 예법. 살기 위해 터득한 것이였지만 인사를 하는 하루 자신조차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도련님. 신세계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도련님. 신세계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도련님. 가증스러운. 귀족 나으리. 여자아이인 하루의 손보다도 곧고 예쁘게 뻗은 손이 비단 장갑에 쌓여있었다. 잘 손질된 머리. 깔끔하게 무두질 된 가죽구두. 저쪽도 세계는 없고 하루만 달랑 있자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하루만큼이나 익숙하게 표정을 가리고 웃어보였지만.




"안녕."


"신세계 만나러 여기까지 납신 건가요?"



하루는 이를 악물었다. 신세계 없이 둘이 있는 자리. 아무도 없는 둘만의 자리라는것이 중요했다. 이하루는 데자아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저 도련님은 생각보다 위험하고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였다. 깨끗하지 않다라. 그런 멀끔한 말로 포장된다면 차라리 나았겠지. 이하루가 보기에 데자아는 파티장에 굴러다니는 잘나신 귀족님들과 한치 다를 바가 없었다. 고고하게 사람 위에 서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배하는. 억압하고 부리는, 심지어 교교하기까지 한 존재. 하루에게 자아는 일상을 위협하는 하나의 잘 벼려진 단도같았다. 그냥 날카로운게 다가 아닌, 맹독에 담금질 한. 신세계를 사랑한다라. 정말. 정말 당신은.





"도련님- 아니 당신. 사람 목숨 가지고 막 장난치고. 그걸로 쥐락펴락해대는 쓰레기는 아니지?"



"말버릇이 나쁘군, 어린 아가씨."



"하. 됐어. 마음대로 모욕죄로 집어넣으시던가요. 대신 내 말은 다 들어주셔야 겠어."



만약 네가 그런 쓰레기라면 적어도 내게는 들키지 않는게 좋을 걸. 신세계는 단단히 콩깍지가 껴서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겠지. 하루는 장갑을 빼서 창가에 올려놓으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날 지경이였다. 네가 뭔데.



"네가 그런 새끼라는걸 들키는 순간, 난 신세계가 상사병으로 죽던 말던 네가 영영 찾지 못할 대륙 구석으로, 신세계를 데리고 떠나버릴거니까."



자아의 웃는 얼굴이 순간 무너지며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봐, 그대로 어디에 배껴 그려서 걸어놓고 싶을 정도로 가관이네. 네 가면은 그저 그 정도야? 내 말이 농담이고 허풍같아? 처신 잘 하라고. 나는 신세계랑 쓰레기가 놀아나는건 못보겠는데. 차라리 걜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는게 나을 것 같아서. 그 말을 꺼낸 순간 자아의 얼굴에서 표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완벽하게 사라져 밀랍인형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남의 일에 참견도 많으시네, 아가씨. 가족같은 동료를 빼앗겨서 마음이 아픈가봐. 좋은 짝이나 주선해 줄까?"




자아의 입에서도 독기어린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하루는 비싼 장신구를 머리에서 끌러 바닥에 소리가 나게 떨어뜨렸다. 오랜 시간을 들여 예쁘게 틀어올렸던 머리가 풀어져내리자 그제야 이하루같았다.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네가 신세계를 사랑한다면 언젠가는 이해하는 게 좋을거야."




네가 골목길에 얼마나 굶어죽어가는 아이가 많은줄 알아? 귀족의 화풀이에 죽어나가는 아이들은? 단지 구걸하기 위해 거리에 나갔다 마차에 치여 죽는 아이들. 길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말발굽에 밟혀 스러지는 작은 생명들을. 너에게는 그냥 한 다스로 뭉뚱그려 '평민' 이겠지. 그 아이들의 머리색도, 웃음소리도, 좋아하는 음식도 입던 옷도 우리는 기억하는데.




"우리는 네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그런 것에 목숨을 휘둘리며 살았어!"




너희 귀족들 손짓 하나에 스러져간 사람을 우린 알아. 직접 보며 컸으니까! 쨍하게 울린 하루의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가난을 책으로만 배웠지? 정말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건데 말이야. 어디서 동화책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답니다' 같은 글을 보고와서 대충 그렇겠구나 생각하고 앞에 있는 고급 양과자로 배를 채우며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잠들었겠지. 그래. 아무 일도 아니겠지. 네가 생각하기에 옳은 일이니까.




"그러니까 다른 귀족 손짓 하나에, 신세계가 죽어도 아무 일도 아니겠네."




밀랍인형같던 자아의 얼굴에 새로운 표정이 내리앉았다. 아마도, 분노에 가까운. 담홍색 눈동자와 살구색 눈동자가 맞부딛혔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신세계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그럼 날 노려볼 게 아니지 않아?




"탓할 건 내가 아니라."




소리치며 악을 쓰는 그녀에게 화가 난 자아의 얼굴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대상만 바뀌면 금세 태도가 변하고 마는…"




하루가 반 발자국 물러났지만, 자아는 멈추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네 유치한 논리겠-!"






짜악, 파공음이 울린 순간, 방안의 문이 열렸다. 저기, 도련님? 문 틈새로 그들이 그렇게나 도마에 올렸던 신세계의 얼굴이 보였다. 부어오른 하루의 뺨. 높이 들린 자아의 손. 상황은 명백했지만 또한 명백하지 않았다. 잔뜩 화가 난 하루의 표정도,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 같은 자아의 표정도. 번갈아봤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뭐세요?"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에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세계의 물음만이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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