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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안되겠죠.
플렌은 푸르른 눈을 떴다. 그 움직임에 레이넬 뮤나스-그의 담당 궁정의이다-는 놀란듯 마주 눈을 크게 떴다. 조그만 인간은 자신의 혼잣말이 용을 깨울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용은 대부분 매일매일 자고 있었다. 그러기에 흔한 일이 아녔다.
-죄송해요. 조용히 있을테니까.
플렌은 그의 말에 뭐라 말하려다가 말았다. 용언을 알아듣는 자가 아니라면, 용의 말은 대부분 현대의 인간들에겐 전해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두 종족 간에 좀 더 대화가 쉽곤 했다. 하지만 용의 개체가 줄어든 지금은 아니었다. 플렌이 이 왕국의 수호룡이 되고나선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적어도, 용의 모습으론.
그러기에 그는 마저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건 사실 자는게 아녔다. 그저 의식을 다른데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조금 이쪽에 둬도 될 거 같았다. 다른쪽도, 할 일은 다 했고. 플렌이 다시 잔다고 생각했는지 레이넬은 플렌의 상태를 마저 진단하곤 갈 채비를 했다. 플렌은 아쉬워졌다. 아까 그는 뭔 얘기를 하려던거였을까. 그러나 닫힌 입에선 더 이상 말 할 것 같지 않았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마법을 쓰기에는 미안했다.
플렌은 레이넬을 본 적이 이쪽에서밖에 없다. '이쪽'에서 보는 인간들은 몇명 안 된다. 이름 모를 근위병 몇명과 기사 몇명. 담당 궁정의인 레이넬. 가끔 오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게 다다. 그는 수호룡으로서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다. 전쟁은 이제 없는 시대였으며, 그러기에 용으로서의 대화 또한 의미가 희석되었다. 대화는 다른 쪽에서 하면 되었다. 인간 모습인 플라네스 럼으로서.
그가 수호룡이 되고 몇백년이 지난 뒤, 왕족 럼 가문은 더 이상 대를 이을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수호룡에게 자신들을 위한 존재가 한번 더 되어달라고 기도했으며, 자비로운 플렌은 그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며칠 뒤 럼 가문에는 양자가 생겼다. 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영혼을 생성할 순 없다. 그러니...다른 단말기를 생성한 것 뿐이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조종 가능한.
완벽한 지배자를 원했기에, 그대로 지내왔다. 지배자는 타인들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 고대의 존재인 용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천성적인 지배자니까, 인간의 소원은 이뤄줄 수 있고 그들을 수호할 수 있지만 이해도 감정도 그 무엇도 없어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가끔씩 궁금했다.
그들이 가진 것들이.
그러기에 그는 다음날 레이넬이 와서 오늘의 이상한 말의 다음 말들을 해주길 바랬다. 꼭 눈을 감고 있어야지. 다짐했다.
=
레이넬은 오지 않았다. 뭐, 당연하게도 매일 그가 검진을 하러 오는건 아니었다. 궁정의는 할 일이 많으니까... 튼튼한 용의 몸은 병날 일이 거의 없었고 담당의 검진이란 것도 그저 명목상에 불과한 일이었다. 왕궁은 일 만들어내길 좋아하니까. 플렌은 단말기로서 그를 찾아가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는 호기심대로 움직여선 아니되었다. 단말기는, 왕이니까. 지배자니까. 수호룡과 왕 중 어느 자리가 더 자유롭냐고 묻는다면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저 그는 존재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으며, 그는 그로서 해야 할 일을 했고, 남들의 위에 서 있었다. 남들의 시선은 용일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를 본건 며칠 지나서였는데, 그마저도 직접 마주한건 아니었다. 시선을 느꼈다. 다수의 시선에는 아무렇지 않은 대신 한명의 시선에는 민감했다. 높은 자리에 있다면 암살을 조심해야 할테니까(그야 불멸성을 지니고 있으니 사실 이건 상관없긴 했다.) 정원을 잠시 산책하던 도중에, 기나긴 궁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을때, 창이 트여있는 일층의 테라스에서 차를 마실때. 모두 그라는것을 어디선가 살짝 나온 갈색 머리칼을 보고선 알아챘다. 시선은 금방 사라졌다. 플라네스(단말기가 지닌 이름이다)는 차를 다 마시고선 잔을 내려놓았다. 의혹은 금방 확신이 되었다. 눈빛은 위험하지도, 불안을 띄지도 않았다. 그저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플라네스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세심하고, 아름답지만 필멸의 것이었다. 종족의 감정은 보편적이었지만, 한 개체가 지닌 유일함을 섞은 감정은 금새 사라졌다. 숨을 거두는데까지 채 백년도 걸리지 않으니까. 게다가, 단말기의 외형에 호감을 가진 자라면 그 이전에도 몇명 더 있었다. 외형 말고도 지위와 자리라면 더더욱 많았지만 플렌이 단칼에 쳐내자 그런 자들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플렌은 결혼이라는 걸 시행하지 않기로 했었고, 그러므로 짝에도 관심이 없었다. 배우자로 삼을 만한 용들은 모두 죽었다.
-아마 안될거에요.
플라네스는 방에 돌아와 닿지 않을걸 알면서도 중얼거렸다.
=
-주무시고 계시니 말해도 되겠지? ...그냥, 어. 으음... 말을 걸고 싶어지는데,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란건 마주칠 기회도 없더라고요. 1급 궁정의 정도면 뵐 수 있을거 같은데 전 아직 5급이고.
플렌은 오늘도 자는 척을 했다. 그게 자신을 향한 말이란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상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안 될걸 알면서도 한순간이라도 이런 맘이 든게 말이에요. 하, 사실 용과 만나는게 폐하와 만나는 것보다 어려운걸텐데...
관리차트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탁, 하고 어딘가에 닿은 뒤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괜한 짓 하지 말고 궁정의나 안짤리도록 조심해야겠네. 하아... 쉬는날엔 술집이나 갈까.
그리고 멀어지는 발걸음.
플렌은 눈을 뜨고 제 단말의 무엇이 그렇게나 저 인간을 슬프게 만들었는지 잠시동안 고민했다. 드래곤의 잠시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라 하룻동안 꼬박 그는 업무를 밀려버렸다.
참 오랜만에 이상한 일이었다.
=
-술 한잔 같이 할래요?
레이넬은 제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선 그만 스톨에서 넘어져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을 뻔 했다. 아니, 세상에 어떤 왕이 후드 하나 걸치고선 변장이라고 밖을 나오는가. 손님이 없는 술집이어서 다행이었지, 조금만 인파가 있었다면 난리가 났을거다. 레이넬은 숨을 가다듬고 겨우 말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왕궁 술은 맛 없어서요. 자, 한잔 해요. 살게요.
-아니, 이미 마셨...
꿈을 꾸나 싶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멀리서만 보던 사람과 옆자리에서 술을 마신다니(상대는 자신이 왕궁에서 일하는걸 알까 모를까 궁금했지만) 플라네스는 평소보다 조금 들떠보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기품있어보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신선했다. 가짜인가도 싶었고, 환술인가도 싶었지만 결국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니 될대로 되라, 라는 기분이 되버렸다.
-이런데에, 계시면...
-한잔 마실때마다 그 말 하는게 술버릇인가봐요.
-아뇨...
-음, 편하게 말해도 돼요.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은 떼어지지 않았다. 레이넬은 상대와 함께 더 있고 싶다는 마음을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꿋꿋히 그의 옆자리에 있었다. '그냥,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야.'라는 변명으로, 어떻게 해서든. 작고 붐비는 주점 안에서도, 남자는 빛났다. 언제나 은은하고 고귀하게 빛나는건 그의 존재 자체였다...자신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바라볼.
-많이 취했어요?
-... ...
걱정해주는 말이 좋아서, 취한 기분 그대로 얼굴을 내려 팔에 묻었다. 그거야, 그쪽이 오기 전부터 먹었으니까... 말을 해야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냥 그가 어서 자신을 두고 가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만두기로 한게 오늘 낮이었는데. 그 마음을... 이렇게 당사자를 가까이서 보게되니, 자꾸만 붙잡고 싶어진다.
레이넬은 아무말도 못하게 되기 전에, 쥐어 짜내서 한개만 말하기로 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에 내뱉은 그 말은 레이넬이 돌아와서 몇번이나 집 방문을 차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마지막으로 본 플라네스의 눈빛은 웃음을 참는건지, 놀란건지, 알 수 없는 거였다.
=
다음날 집에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른채로, 레이넬은 술에 찌든 제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진 깔끔한 필기체의 쪽지를 보고 헉, 소리를 내었다.
[아뇨.]
꿈이 아니었다니, ...이 편이 더 죽고싶었다. 한창때의 사춘기 남자애도 아니고, 정말 뭔 짓이냐. 어린애도 이런 질문은 안하겠다...국왕을 상대로 작업같지 않은 작업을 걸어버린 레이넬은 어기적대며 준비하고선 오늘도 근무를 향해 나섰다. 오늘도 5급 궁정의의 업무는 똑같았다. 용님의 건강 살피기는 그에게 유일하게 안식처가 되는 곳이었다. 그 커다란 자태를 보고 있자면, 그냥...기분이 나아졌다. 나쁜거도 우울한 것도 전부 사라지고, 상사의 잔소리도 잊게되는 신비로운 시간이었다. 드래곤들은 다들 대단하다니까, 분명 그런 능력도 있지 않을까.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오늘도 드래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러고보니, 얼마전에 그때 눈을 뜬건...역시 우연이었을까. 너무나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두루뭉술하게 누구에게 말하듯 내뱉었던 그 때, 딱 드래곤님이 눈을 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곧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 상황에 놓이면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놀랐을 것이다. 그는 그 후로 드래곤의 앞에서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라기엔 어제도 했지만)
'드래곤님들은 말야, 착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대.'
문득 어릴적에 친구와 놀다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축제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언젠간 꼭 보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먹고살기가 바빠 잊었고 이제야 떠올린 추억이었다. 전설과,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지금은 제 앞에 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갑자기 자신이 소원을 빌자 브레스에 타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조금 더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포기하지 못한 아망을 말로 내뱉자 귀끝이 붉어진다. 대상을 말하지 않은걸 자신도 안다,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용기를 내어 한번 더 말했다.
-좋아하는 상대와...말을 나누고 싶어요.
커다란 돔 형 공간에 제 작은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많이 울렸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제 뒤에서 뚜벅뚜벅 하고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를 들어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보았다.
-얼마든지요.
-ㅍ,폐...
호칭을 부르지 못할 정도로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흰 정복을 입은 플라네스 럼이었다. 레이넬이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겨우 다시 말했다. 이건 착각일거야, 라는 생각으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소원이요.
-예?
-소원, 빌었잖아요?
-...네?
레이넬은 뭐라 답할지 몰라서 눈 앞이 빙글거렸다. 아니, 그게 맞는데. 어떻게 알고 온거지. 상대도 안 말했는데. 환상인가, 혹시 처음부터 여기 있던걸까...
-좋아요.
-네?
-저랑 얘기하고 싶다면서요.
-네...
그 말에 상대가 미소짓는걸 보자, 레이넬은 더욱이 큰 현기증이 돌았다. 몸이 떨리는 감각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어디가 좋나요? 저번처럼 술집? 아니면 정원? 궁 안은 역시 불편한가요.
-저는...
-아, 말 편히 해줘도 좋으니까요.
다가와 그가 제 손을 잡아주자, 온기에 레이넬은 마음이 좀 놓였다. 온기는 낯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당신이 있으면 어디든 좋을거 같아.
그리고 용은 그 말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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