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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의 무채색의 시야를 흔들어, 그는 자신만의 색을 펠트 모자 속에서 꺼내는 듯이 보였다.
투명하지도 그리 밝지도, 선명하지도 않지만 그 누구도 홀릴 듯한 색.
언제부터 그렇게 보였던걸까?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에는 너무나도 극명한 사실이었고, 자신 외에 다른 많은 사람-관중들도 그렇게 느꼈을까봐 평소 답지 않은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싹튼 조바심을 스스로 알아 챈 순간, 마술 쇼 중간에 데자아는 벌떡 일어서 집으로 가버리려고 했으나 참고 그를 끝까지 쳐다보았다. 대신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헛웃음만 흘렸다.
스포트라이트, 마지막 피날레. 휘장과 꽃가루가 흩날린다. 감사합니다. 무대 한가운데에 선 그의 입은 다물어진 채 스피커에서 굵은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오늘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다행이네...-쇼가 끝나고 마술사를 향해 박수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그는 던지려던 장미를 들고 그대로 밖으로 나와버렸다. 사실 전혀 다행이지 않았다.
-
'오늘은 없네...'
분장을 씻고 대기실에 앉아보니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원래 아무것도 없는게 당연했지만. 자신이 너무 선물에 익숙해진 것 같아서 새삼 부끄러워졌다.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줄 알지...신세계. 그렇지만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보니 비춰진 자신의 표정이 왜인지 매우 시무룩하다. 웃어, 신세계. 무대 위에선 그렇게 잘 웃더니...마음을 추스리며 괜히 마술 도구인 카드들을 정리했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일어서서 넓지 않은 방 안을 돌아다녔다.
이젠 날 보러 오는게 싫어진걸까... 무슨 일이 생긴걸까, 오늘 관람석을 더 잘 볼걸 그랬어. 사실 자신도 이 선물을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치가 아주 없는 편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무언가는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
삼개월 전부터 매번. 일주일에 딱 한번 있는 그의 마술 쇼. 끝나고 대기실에 들어와보면 선물이 들어와있었다. 고급스러운 와인. 지갑. 넥타이 핀. 시계. 스킨 향수. 그동안 아주 가끔 들어왔던 선물이 아니다. 딱 봐도 비싼걸 알아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으나 도무지 이것들을 보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귀신이 두고갔나. 할 수 없이 집으로 들고 갔지만 겁이 나 사용하지 않았다. 무언가, 무거웠다.
딱 한번, 건드린 선물이라고 한다면 그의 생일날 진행된 쇼 후에 놓여있던 케이크와 샴페인이었다. 그리고 간단한 카드 한장. 두근두근 하며 열어본 카드 안에는 약간 흘려적은 작지 않은 필체로 생일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팬이-라고 적혀있었다. 스토커인가, 하고 세계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가 제 생일은 이미 알려져있다는 것에 한숨을 내뱉었다. 프로필에 있었지. 월일 뿐만이 아니라 년도도. 유명한 마술사까진 아녔어도 고정 쇼를 하고 있으니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을 톡톡 두드리며 그는 집으로 돌아가 혼자 케이크를 먹었다. 그 사람도 차라리 같이 먹으면 좋을텐데.
그 카드만은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그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주 후인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속물이 된거니, 신세계. 사용하진 않더라도 은근 기대하고 있던거잖아? 나중에 다 팔아치우려고 그러지, 그 명품들? 한 쪽에서는 또 중얼댄다. 그게 뭐 어때. 나 쓰라고 준건데. 팬이 준거라잖아.
"... ..."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이만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걸 준 사람은 누굴까? 저번의 그 카드는 진짜 직접 썼던걸까. 왜 날... 좋아하는걸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카드 마술사라니, 텔레비젼에 나오는 예쁘고 멋진 아이돌들이면 모를까. 조금 팬이라구 어디 가서 말하기엔 그렇지 않아요?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묻자 상상 속의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를.
정적이 흐른다.
아, 나는 못 묻지. 만난다 하더라도 목소리가 안나오잖아.
의미없는 상상은 툭 끊어졌다. 수첩이 떨어져 다시 주웠다.
-
데자아가 그를 단념하고 이 주. 그동안은 무시하다가 이젠 거절할 수가 없어 억지로라도 몇 차례 들어왔었던 맞선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나이가 겨우 몇인데 벌써 결혼 타령인지. 새파란 이십대인데. 아무튼 바람 맞힐 수는 없어 가서 공손하게 거절이라도 하고 올 생각이었다. 뒤에서 소문 돌아봤자 무슨 소용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지나가는 도중에 그를 만났다.
짐이 있었는지 종이 쇼핑백에 넣어서 한가득 들고 가다가 헐거워져서 터졌나보다. 옷가지들이랑, 잡다한 물건들이 떨어져 길거리에서 줍고 있었다. 자아는 눈을 비볐다. 스테이지 위의 그가 아니었지만, 그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몇번이고 혼자 그려왔으니까. 지워버리기로 마음 먹고서도 지우지 못한.
마술사를.
"저기-."
자아는 허리를 굽혀 물건들을 주워들며 세계에게 말을 걸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손바닥을 흔들지만 자아는 꿋꿋히 제 품에 들 수 있을 만큼 들었고, 둘이 거의 다 줍자 순간 쨍쨍했던 하늘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어어, 하늘만 쳐다보는 검은 눈. 자아는 멍하니 있는 그의 손목을 잡고 근처 까페로 들어갔다.
이미 머릿속엔 맞선이고 뭐고 없었다.
"많이 젖었습니까?"
자아의 말에 도리도리 젓는 고개. 어린아이처럼 웃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이내 어색하게 있다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세계는 수첩을 찾지 못했는지 까페의 화장지에 펜으로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닙니다."
자아는 자신이 그가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받아들인채로 첫 만남을 가졌나, 라고 잠시 뒤에 조금 후회했다. 하지만 창 밖을 내다보는 그의 표정은 그런 고민마저도 생각하지 못하게 날려버려서, 자아는 제 장갑만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나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왜 자신은 이 사람을 만지고 싶은걸까. 처음에는 그저 마술에 홀린 줄로만 알았고, 무대의 매혹이라고 착각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세계를 자신이 만지고 껴안고 얘기하고 싶다는 욕망에 휘몰렸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래서 놓았다. 하지만... ...이렇게 제 앞에 나타났으니까.
한번 더 기회라는 걸까.
자아는 그에게 뭐라고 말을 붙일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이십 몇년을 살아온 도련님은 비즈니스 면에서는 무슨 말을 할 줄 알아도 자신이 호감을 가지는 존재에게는 뭐라 한마디 꺼내기 어려웠다. 누구랑 닮았다고 할까? 마술 쇼 이야기를 꺼내야하나? 역시 왜 말을 못하는지 물어보면 안되겠지...
...먼저 말을 내뱉은건(정확히는 쓴건) 세계였다.
[시계 멋지네요.]
메모지를 톡톡, 두드린다. 그제서야 자아는 그가 한 말을 눈치채고 제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 감사합니다. 세계는 웃었다. 분명 자아 자신의 표정이 이상했을 것이다.
-
세계는 집에 돌아가 자신이 받았던 시계의 투명 포장을 띁어보았다. 맨 처음에 한번 끌렀다 다시 붙였던거라 헐거워져있어서 그닥 어렵지 않았다. 이정도론 환불 해주겠지.
그리고 역시 그의 기억과 다르지 않게, 낮에 만났던 남자가 차고 있던 브랜드의 것과 똑같았다.
세계는 그에게서 받은 명함을(왜 준건진 모르겠다) 한참동안 보다가, 창 밖으로 떨구었다. 팔랑팔랑 날아가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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