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랠

Tayo)서양 패러랠 1

EKKSEIN 2014. 3. 10. 09:18



"꽤 잘 두는데, 일부러 져줄 필요까지는 없어."

비숍을 들어올린 세계의 오른손이 멈칫했다. 아무래도 저쪽 도련님은 꽤나 눈치도, 머리도 좋은 모양이였다. 대체 왜 부른건지. 하필 왜 신세계인지. 세계는 들어올린 비숍을 세 칸 움직여 자아의 나이트를 따냈다. 후우.


"제가 져주는 걸로 보이세요?"

"그럼 아닌가?"


그렇게 질문 받으면 할 말 없긴 한데. 귀족나으리니까 심기를 거슬리지 않게, 그렇다고 잘난 자존심 스크래치 나지 않게 적당히-그러나 어렵게-져주는 것이 신세계식 체스였다. 그러나 눈 앞의 젊은 귀족, 데자아에게는 그것조차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꽤 예쁘지. 수정으로 만든 체스말에 상아로 만든 체스판이라니."


그 비싼 체스말을 손 안에서 갖고 놀던 자아의 룩이 앞으로 이동했다. 눈치 채지 못하게 져주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세계를 이기기에는 조금 모자란 상대. 심지어 눈썰미까지 좋은. 귀족. 세계는 눈쌀을 찌푸렸다. 이것도 일종의 시험인걸까.

둘 줄 알아? 라고 묻길래 세계는 자연스레 자아가 자신을 얕본다고 생각했지만, 자아는 이미 세계에 대한 정보는 꽤나 가진 상태였다. 주관적 의견이 들어가지 않은 일말의 서류에 불과했지만 세계가 할 줄 아는 것 정도는 씌어져 있었기에. 자아는 모른 척 빙글대며 체스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때? 나에게서 질 수 있을 것 같아?"

"……."


꽤나 독특한 질문. 그러나 올바른 질문. 세계는 고개를 저으며 폰을 체스판 끝까지 움직였다. 무사한 도달, 그리고…


"퀴닝."


금새 졸에서 여왕의 왕관을 쓰게 된 폰이 위세를 자랑헀다. 자아에게는 승산 없는 게임이였다. 판세와는 다르게 자아는 미소짓고 있었고 세계는 찡그리고 있었지만. 세계는 새로운 퀸을 움직여 자아의 룩을 제거했다. 체크메이트였다.



"역시 소문대로네. 훌륭해. 칭찬해 줄 만 한 솜씨야."


자아가 킹을 넘어뜨리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챙강, 짝짝짝. 세계에게는 조롱의 의미로 들렸지만, 정작 자아는 반쯤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로 머리가 좋은 아이-동갑이지만-였다. 판단력, 지식, 손재주까지 우수했다. 자아는 서랍 속의, 거의 완벽한 위조품이였던 파티 초대장을 떠올렸다. 


"저랑 체스를 두려고 여기까지 부르신 겁니까?"


무려 백작 저邸까지- 저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가 나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던 세계가 쓰러진 자아의 킹을 노려봤다. 빛이 체스말에 굴절되서 기묘한 문양을 그려냈다. 바라보고있자니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구긴 세계를 빤히 바라보던 자아가 의자에서 우아하게 일어나 구석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그건…!"

"곤란하겠지. 이런게 '귀족 나으리' 손에 있다면."


자아가 붉은 밀랍 자국이 남아있는 초대장을 팔락거렸다. 훌륭한. 오히려 원본보다 정교해 보이는 장식이 새겨진 금박-세계가 만든 가짜는 금도 가짜였지만-초대장. 자아가 어딘가에 들고 가 가짜라고 신고해버리면 세계도, 하루도, 아니 어쩌면 모두가 끝날 수도 있는 위험한 증거품이였다. 어떻게…!


"!"


"좋아. 이걸 빚으로 달아둘게."


휙,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진 초대장이 벽난로에 들어가 매캐한 냄새를 나며 타들어갔다. 세계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중요 증거물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림자에 드리워진 자아의 표정은 찰나 변했지만, 읽기 힘들었다. 세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빚이라고?


"가도 좋아. 빚 정산은 나중에 할 테니."


그새 살짝 그을린 장갑을 벗어 벽난로에 같이 던져버린 자아가 축객령-자아가 그리 생각하지 않더라도-을 내렸다. 세계는 생각이 뒤엉켜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몇몇의 하녀들이 들어와 체스판과 다 식은 찻잔을 가지고 나갔다. 


"퀴닝이라. 비단 체스말의 이야기만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렇지, 신세계? 

눈 앞의 자아는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