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k)중세 뱀파이어 1
"영주님!"
자아는 집사를 18년동안 봐왔지만-물론 어렸을 적은 완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비유적인 표현이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그가 이렇게 허둥지둥 자신의 방에 아침부터 달려와 다급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찻수저를 떨어뜨렸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을 것이다.
-쨍.
아침의 식사 후 밀크티 한잔은 자아의 몇 안되는 낙이었으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의 행동이 의아해진 자아는 찻잔을 내려두고 물어보았다. 깨진 찻수저는 조금 아쉬웠다. 크리스탈 장미 장식이 마음에 드는거였는데.
"무슨 일입니까."
"저...그것이, 잡혔다고 합니다. 오늘 새벽에 자경대쪽에서 연락이 와서 영주님께 당장."
"그것이라니."
늙은 집사는 약간 떠는듯이 말했다.
"흡혈귀...말입니다."
-
흡혈귀는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뾰족한 송곳니도, 피막 날개도 없었으며 뿔이나 사악한 인상조차.
다만 딱 하나 책속에서 보아왔던 것과 같이 그럴싸하다고 여겼던 것은 어딘가 건강하지 못한 창백한 피부였다. 만지면 부서질 거 같은. 자아와 비슷한 나이대처럼 보이는 검은 머리의 소년은 의자에 로프로 몇겹이나 묶여져 앉혀있었다. 옅은 호흡은 그가 죽지 않았다는걸 의미했다. 자경대원들과 한바탕 싸우긴 했는지 낡은 옷은 이리저리 찢어져있었으며 볼에는 검에 얇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그 외 심한 외상은 없어보였다.
아니, 흡혈귀는 이런 방법으로는 죽지 않지. 오직 태양과 은송곳만이 그를 죽일 것이다. 자경대원들은 그를 그 자리에서 처분하기보다는 그들의 주인에게 데려오는것을 선택했다.
감옥 대용인 작고 어두운 지하 방에 들어서 그를 관찰하면서 자아는 팔짱을 꼈다. 자아를 보며 흡혈귀는 감고있던 붉은 눈을 스르르 떴다.
"...한쪽만 붉네."
캘록 캘록, 기침을 하는 흡혈귀는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거 같은 인상을 하고 있어서 자아는 표정을 찡그렸다. 연기같아보이진 않았지만, 괴물 치고는 너무 약한거 아닌가. 애초에 진짜 흡혈귀이긴 한가. 그동안 자신의 영지 내에서 돌던 소문과 피해를 생각했다. 아이들이 피가 빨린채 죽어있고, 집에서 기르는 닭과 소가 목이 잘린채 죽어있었으며 무차별적으로 살인당했던 그 일들이-
"나는 아니야..."
"뭐?"
"나는, 캘록...히끅...안했어."
흡혈귀는 울거같은 표정으로 자아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가까이 가진 마십시오, 괴물이니까요. 밖에서 자경대원들에게 들은 말들을 자아는 한번 되새겨보다가 그의 주변을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궁금하긴 했다, 진짜 괴물인지. 그가 진짜 죄를 저질렀는지.
-말이 통하는 검은 머리의 마물이라.
"네가 아니라면, 지금껏 영지에 일어난 일이 있었다는건 어떻게 안거지."
"...가끔씩 여기에 와, 먹을걸 사야하니까."
"피를 먹는게 아니었어?"
"...히끅, 윽... 피는 숲속의 동물들만...사람건 안 먹어. 나머지는 나도 보통 식사를..."
"믿을 수 없는 소리네. 북쪽 숲에서 살았나보지? 거긴 내 영지야."
"난...태어났을때부터 거기 살았어."
곧 흡혈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언가 말하고싶은건 많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마물이었다. 중앙 교회에서는 엑소시스트들을 만들어내 흡혈귀들을 10여년전부터 박멸해왔다. 그 활동으로서 교회는 왕국내의 입지를 다져왔고, 흡혈귀가 아닌 자들도 종종 흡혈귀로 만들어내 죽이곤 했다. 명분이란 중요했고 희생양은 어디서나 만들 수 있었다. 자아는 중앙으로부터 먼 영지의 젊은 영주였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왜 인간의 피는 마시지 않지?"
"...어머니는 인간이셨는걸, 나도 반쯤은...아냐."
메마른 목소리로 그는 하던 말을 멈춘다. 아마 자신도 인간이다, 라는 말을 하고싶었을 것이다. 자아는 하, 하고 짧게 비웃었다. 인간인 척 하는 괴물이라.
꽤나
흥미로웠다.
"앞으로도 마실 생각은 없고?"
"... ..."
"약해보이는데, 그게 아마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아서겠지. 혈통 문제도 있겠지만."
자아는 잠시 정적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발을 멈추어 섰다가, 갑자기 그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그리고 손목을 쑥 내밀었다. 놀란 흡혈귀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먹어. 아니, 마셔."
"...응? 잠깐만..."
"마시라고."
아니, 이건... 머뭇거리며 고개를 뒤로 빼는 흡혈귀에게 더욱 들이밀었다. 두근거리는 맥, 심장이 내보내는 혈액이 흐르는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팔이 묶여있어 뭣도 하지 못하고 울듯이 고개만 젓는 흡혈귀에게 자아는 자세를 바꾸어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안기듯이 자신의 목덜미를 내주었다.
그 괴물에게는, 살면서 처음 느껴본 달콤함이었으리라고 자아는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만났네."
자아는 웃었다. 결국 흡혈욕을 참지 못하고 괴물은 자아의 목을 물어띁듯이 깨물어 어미의 젖을 빠는 아이처럼 피를 빨기 시작했다. 아찔한 감각. 죽음과 삶의 경계를 내어주는. 영주는 소근거리듯이 그에게 말해주었다.
"나의---"
주르륵, 정신없이 빨다가 목덜미에서 입을 뗀 그의 입술 사이로 붉디 붉은 피가 흘렀다. 자아는 아찔히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이내 단추 칼라를 단정히 고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 똑바로 섰다.
하아, 하아 하고 가쁜 숨을 내뱉는 상기된 얼굴의 괴물은 방금이라도 관계를 맺은 거 같이 보여 조금 우스웠다.
"할아버지께서,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시던게 정말이었나보네. 안 믿었는데."
자아는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 볼에 있던 상처가 마술같이 사라졌다. 어, 하고 놀라는 괴물에게 그리고 이내 자신의 손등을 보여주었다.
"내 표식이 네게 반응하고있어. 네가 그 가문의 마지막 남은 흡혈귀인가보지."
-
[할아버지가 말이지, 어렸을때 들은 얘기란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영주가 되기전에 여행을 다니다가 흡혈귀를 만났는데 글쎄 그 흡혈귀가 흡혈귀인지 모르고, 친구가 되어 같이 재밌게 다녔다고 하질 않니. 그땐 중앙에서도 흡혈귀를 안 잡으려고 했단다. 사람 피를 안 마셨거든. 요즘은 마신다냐? 아무튼 여행을 하다 위기에 처해서 흡혈귀가 죽을뻔했는데, 할아버지가 자기 피를 먹였대. 그런데 흡혈귀는 한사코 못 마신다고 떼를 쓰는거야. 그래서 둘은 계약을 맺었다고 해. 뭐더라... 그 가문의 흡혈귀는 우리 가문 직계 사람의 소원을 하나 들어줄 수 있는 대신,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그 흡혈귀 가문의 먹이가 되는 조건이었나. 먹이라고 해서 죽이거나 그런게 아냐, 조금만 마셔도 보통 피보다 효능이 높아진다는 마법을 걸었다고 하더라고. 그 후로도 같이 여행을 다니다가 헤어지는날 소원을 빌었는데, 그게 영주가 되고싶다는 소원이었지. 그때부터 우리 가문이 이어져온거란다. 이 표식도 말이야. 뭐, 장갑 끼기 싫다고? 에고, 벗고 다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