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랠

Ekk)마녀 패러랠

EKKSEIN 2014. 3. 10. 10:00


세계는 북쪽 숲에 가기 싫었다. 비록 자원해서 왔다지만, 정말 정말 싫었다. 숲의 깊숙히 들어온 지금이라도 당장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햇빛 한점 비춰지지 않는 빽빽한 침엽수림 안은 어둡고, 고요하며 침입자를 꺼려하는 거 같았다. 가끔씩 들리는 새소리도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애초에 이건 자원이 아녔다. 보이지않는 강압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착한 아이였고, 아픈 동생을 위해 제발로 북쪽 숲에 가는 형이 되어야만 했다. 하하, 옛날 얘기에나 나올법한 상황 아닌가. 하지만 동생은 오늘내일 하는 상태였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오직 북쪽 숲에 있는 하얀 약초라고 했다. 물론 말로만 내려오는 전설이었지 그걸 실제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고 하니 우스운 짓이었지만, 가느다란 희망에라도 집착해보는게 인간이었다.


세계도 갑자기 앓기 시작해 온몸에 열꽃이 얼룩덜룩한 동생을 아예 내칠만큼 매정한 인간은 아니기도 했고.




날씨는 꽤나 추웠다-어쩌면 그저 그가 걸친 옷이 다른이들보다 얇았던 탓이었을지도 모른다-이제 이월이지만 숲 안쪽은 십이월과 다를 바 없었으며, 주변 음지에는 눈들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걷다가 눈이 잔뜩 쌓인 나무를 잘못 건드려 쏟아지는 눈을 머리에 맞기도 했으며, 살얼음이 낀 강 위는 차마 건너지 못하고 뱅뱅 돌아갔다. 도대체 어딨는거야, 몸이 차가워지니 머리가 멍해졌다. 슬슬 다리에 감각이 없어질 때쯤 세계는 발을 삐끗해 돌부리에 넘어졌고, 쓰린 무릎을 잡고 일어서야만 했다.


"아야..."


바지 위로도 핏자국이 보였다. 깨졌나. 아릿한 통증이 전해져와 세계는 절룩거리면서 집고 갈 지팡이 대용의 나뭇가지가 주변에 없나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발견한 건, 나뭇가지 이상의 의외의 것이었다.


불빛...집?


이런 깊숙한 곳에 집이라. 그러고보니 숲에 대한 소문이 하나 더 있었다. 숲속 어딘가에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가 살고 있다고. 아주 오래전에 마을에서 쫓겨 난 사악한 마녀가 숲속에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북쪽 숲속에 가기를 꺼려했으며, 땔감같은건 모두 동쪽 숲에서 가져오곤 했다. 증거같은건 아무것도 없는데, 단지 미신일 뿐인데.


그러나 확실히 그 불빛에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그곳에 오라고 말하는 거 같은 흐릿하고도 밝은 -흔들거리는 불빛.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세계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녀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마녀라면 환영일지도. 자신이 죽을 명분이 생기니까.




-



"어..."


멀리서 볼땐 몰랐는데 꽤나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그래봤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일줄 알았는데, 이런 숲에 번듯한 이층집이라? 역시 마법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세계는 정원을 지나 -겨울인데도 꽃이 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금속제 노커를 슬쩍 두어번 두들긴 후 얌전히 기다렸다.


-끼이익.


순간 문이 저절로 열려, 세계는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이곳에 사는 사람이, 이 저택의 주인이 마녀가 분명할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건 마녀밖에 없어. 하얀 약초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까. 마녀는 영혼을 달라고 하던데, 내 영혼을 요구하려나. 하지만 모든건 그의 예상과 어긋나있었다. 아니, 사실 '모든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릎이 깨졌네."


흠칫, 이리저리 고풍스러운 집안 내부를 둘러보던 세계의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와 그는 넘어질 뻔 했다. 어, 어어, 음. 뭐라 말을 해야할텐데 당황해서 입 밖으로 인사가 나가지 않자, 상대는 이해한다는듯이 웃으며 소파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세계를 보며 앉으라고 하는 거 같았다.


"그게, 넘어져서..."

"알고 있어."

"...알고 있었구나."


갈색 머리의 자신과 나잇대가 비슷해보이는 또래 소년은 세계가 소파에 앉자,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세계의 상처부위에 손바닥을 대었다. 슬슬 딱지가 지고 있지 않으려나. 다 됐어, 라고 소년은 말했고 세계는 어? 하고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가뿐한...느낌.


"뭘 한거야?"

"글쎄, 뭘 거 같아?"


그는 몸을 돌리고 가볍게 미소지으며 옆의 협탁에서 다시 찻잔을 집어들었다. 자신이 오기 전부터 마시고 있는 듯 싶었다. 이젠 식었겠지. 어안이 벙벙한채로 세계가 고마워...라고 말하자 그래, 라는 답이 돌아왔다.


괜찮아, 도 아니고 별 말씀을, 도 아니고 그래-라니.


상대는 고급스러워보이는, 그러나 거추장스러워보이지는 않는 셔츠와 조끼를 껴입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에 살짝 아까의 피가 묻어있어, 세계는 조금 미안해짐과 동시에 멀쩡해진 무릎을 만지작거리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억해냈다. 동생은 이미 숨이 끊어졌을까. 그렇지 않길 빌며 어서 돌아가야 했다. 장식장에 놓여진 얼룩이 많은 사진들을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하얀...약초가 어딨는지 알고 있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알고 있다면 알려줘. 동생이 죽어가고 있어. 왜인지 너라면 알거 같기도 하고..."


탁, 하고 찻잔이 내려져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왜?"


앉아있는 세계를 내려다보는 그는 더 이상 웃고있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사람인 듯 싶은, 그러한 분위기. 당장이라도 도망가고싶어지는.


"아니, 그게. 혹시라도 알고 있다면..."

"싫은데."

"왜?"

"그냥, 내가 널 왜 도와줘야하는데?"

"아까전에 내 상처는 고쳐줬잖아."

"그거야 내가 하고싶었으니까."


이래저래 이상하고 변덕쟁이인 녀석이었다. 장갑을 벗은 채로 그는 크고 길다라며, 고와보이는 손으로 세계의 검은 머리칼 하나를 툭, 뽑아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세계의 얼굴이 천천히 울상을 짓자 다시 한번 바라본다.


"...뭐, 내 맘이 바뀔 수도 있는데."


올려다본 고개와 시선이 마주친다.


"이 저택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아. 뭔 말인지 알겠어?"


뚱딴지 같은 말이었지만, 세계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동생도, 하얀 약초도 잊은 지 오래같았지만 그래도 그걸 완전히 잊는다면 그가 여기 있는 이유가, 사실이 없어지게 된다.


"...내 이름을 알아내. 어떠한 수단을 쓰든 상관없어."

"이름?"

"그래, 내 이름. 며칠이 걸려도 괜찮아. 여기서 나간다면 네 시간은 원래대로 흘러가겠지만. 그렇지만 포기한다면... 더 큰 댓가를 치뤄야 할걸. 이 저택에 온 값으로."


그는 천천히 세계에게 가까이 다가와 긴 손가락으로 턱을 한번 슥, 훑었다. 그리고선 세계의 눈묻은 코트를 능숙하게 벗겨내고 등을 돌려 불가쪽의 의자로 다가가 거기에 코트를 걸어두었다.



"이름이란 말이지, 이름...이름."


세계는 몇번이고 자신에게 각인시키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미지근하게 마녀인지 귀신인지 모를 소년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